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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원과 대천덕 형제

 

43년전 미국에 있던 대천덕(아쳐 토레이) 형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가고 싶지도 않았던 한국에 가서 선교사역을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1957년 한국에 와서 미가엘신학원을 재건하고 7년동안 교장을 재직하는 중인 1964년 어느 날 형제와 사모에게 똑같은 음성으로 당시 안정되었던 교장직을 사임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미련 없이 교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간 형제와 사모는 무일푼인 상태에서 아무런 일도 할수 없었는데, 어느날 전혀 알지 못하는 분을 만났고 그분이 기증한 증권(주식)을 받아 그 동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산 실험실]을 깊은 산 속에 만들 계획을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65년 다시 한국에 와서 강원도 태백의 오지인 하시미리란 곳에 하나님 살아 계심을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산 실험실인 [예수원]을 창설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설립시부터 34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연속으로, 도무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오늘도 예수원은 많은 믿음을 가진 형제들에게 존경과 부러움 그리고 경이로운 장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쇄신과 평신도운동, 세계평화와 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의 집으로 설립된 예수원은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요, 노동하는 것이 기도]라는 정신으로 설립하여 오늘도 [기도와 노동]을 통한 성령의 코이노니아(교제)를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위 내용은 예수원의 뜻과는 무관한 것으로 발행인의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책 머리에

 

“성령을 받겠다는 정신보다는 받자마자 주겠다는 정신이 되어야…”

우리는 성령을 주십시오 주십시오 하는 받겠다는 정신보다는 성령을 받자마자 주겠다는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 받고 말겠다는 이기적인 정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베풀고 주는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자마자 남에게 성령을 전달해야 합니다. 성령 받는 것은 남을 위해 받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샘물처럼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나아가 주어야 합니다. 사해는 왜 사해라고 하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는 것 없이 계속 받기만 하면 사해와 같이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죽은 신앙과 다름이 없습니다.
현대교회는 대부분 예수만을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을 강조합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예수님 전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입니다. 우리가 문에 서서 들어가지는 않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문 앞에 서서 아! 이 문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문 얼마나 좋습니까? 문만 훌륭하다고 찬양합니다. 아닙니다.
출입문을 보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문 앞에 서서 왜 문만 찬양합니까?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문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 없이 들어갈 수 없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철학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 됩니다. 공부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인줄 알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송가를 보면 죄 사함을 받았다고 감사하는 찬송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문 앞에서 문을 찬양하는 찬송입니다. 출입문을 통과했다. 아! 기쁘다. 그뿐입니다. 더 이상 알맹이가 없습니다.
또 대부분은 지금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죽을 때 들어가겠다는 내용들입니다. 죄 사함을 얻었으니 나중에 천당에 가겠다. 그러면 죄 사함을 받은 지금부터 50년 후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겠습니까? 십자가와 죄 사함에 대해 찬미만 하고 그것밖에 없는 것입니까?
찬송가를 보면 그런 내용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자마자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남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샘물처럼 나가서 남에게 도움을 줘야 합니다. 이 사회 소금 역할 빛 역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천당에 가만히 계시면서 우리보고 죽어서 올라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재림하겠다고 다시 우리에게 오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오실 때 이미 죽은 사람들은 그때 부활하겠고, 또 살아있는 우리들도 그냥 들림을 받아 갑자기 한순간에 새 몸을 받아 사차원적인 온전한 몸을 가지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몸과 똑같이 우리도 그러한 몸을 받아 공중에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가서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네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성령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성령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올바르게 살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것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다섯 문장밖에 안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신학교까지 16년이란 기간을 배워야 합니까?
문맹자도 전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그 간단한 사실을 친구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할 일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 나는 공부 못해서 말 못합니다. 그것은 아주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본인 이름 알거든 예수 이름도 알지 않습니까? 전도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 보내주신 것은 우리에게 주의 일을 하려고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사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창조하신 후 마지막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혼자 있기를 싫어하십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교회는 개인밖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올바르게 살면 천국에 간다. 현대교회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기 혼자 잘살려는 이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사회에 소금이 되라” “사회의 빛이 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후레쉬가 산길을 비출 때 길을 비추지 못하면 쓸데가 없습니다. 그 빛을 가지고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로 현대교회는 거기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할렐루야 빛이 있다” “와 보라! 여기 빛이 있다” 하지만 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길!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대략 주전 1400년부터 주전 800년까지는 하나님의 법대로 토지법을 실행하며 모두들 잘살았습니다. 아합왕때부터 희년을 버리고 그때부터 토지를 가지고 투자하기 시작해서 서로가 땅을 뺏고, 빼앗기고 그래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현대사회의 법은 구약시대 가장 악하다고 하는 오무리와 아합왕때의 법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사회의 잘못된 법을 어떻게 바로 잡겠습니까? 고치지도 못하고 또 고치도록 노력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사회의 빛이 될 수 있으며 하물며 길을 보여 줄 수가 있겠습니까? 사회의 길은 외면하고 천당가는 쪽만 길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우리 국회에 크리스천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일반사회보다는 퍼센트가 높을 것입니다. 일반사회 25%지만 국회의원은 그 이상 될 것입니다. 얼마전 제가 국회에 국회의원 초청모임에 초대해서 나갔습니다. 국회 크리스천중 일부밖에 안 모였습니다. 그때 제가 구약시대에 나오는 성경 경제법에 대해 설교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우리도 그것을 실행하고자 해서 우리가 지금 토지법을 만드는 중입니다. 잘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인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나고 보니 86가지 토지법이 나왔는데, 하나님의 토지법은 안 나왔습니다. 딴 얘기만 자꾸 해요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투표권자들만 생각하고 나라의 장래나 하나님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막만 치고 있습니다. 하는 척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토지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경제법을 연구해야 하는데 국회의원은 물론 신학자들조차 연구하지 않습니다.
요한1서 3장 15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같이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함이 마땅하니라. 누구든지 이 땅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의 문을 닫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할 수가 있겠느냐?” 17절까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의 궁핍함을 보면서 문제 해결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살인하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우리 신학자들이 일생동안 신학 연구하면서도 이 궁핍한 문제를 연구하지 않습니까? 왜? 무관심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관심 하는 것, 그게 바로 살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될 것입니까?
실제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 실제적인 해답서입니다. 철학 책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렇게 살아야한다 저렇게 살아야한다는 지침서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이 실제문제 취급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학자에게 가서 성경 경제법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 그것은 경제학자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기독교 대학에 가서 경제학자를 찾아 성경의 경제법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 저는 성경을 몰라요.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하고 서로가 책임을 전가합니다. 왜 그러는지 알겠습니까? 그 답변에 책임을 묻는다면 혹 나도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바른말 못합니다.
예 부자들을 두려워합니다. 지주들을 두려워합니다. 지주들이 이 세상에서 세력을 다 잡았어요. 민주주의라는 말. 하 허울 좋은 말입니다. 바로 지주주의입니다. 지주들이 세력을 다 잡고 있어요. 학자들도 두려워서 입을 닫습니다. 참말하면 쫒겨 날까봐, 먹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합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누가 하겠습니까? 선지자.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선지자는 월급 없는 평신도들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 대부분 평신도였어요. 대가없는 평신도. 레위인 중 선지자가 둘 있었는데 실업자가 된 레위인, 에스겔, 그도 레위인 역할 못했어요. 사로잡힌 상태에서 레위인 역할 할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 에스겔은 레위인 이지만 자기 역할 못하고 평신도 입장에서 선지자 역할 했어요. 예레미야 - 제사장인데 일 못하는 제사장이었어요. 실업자가 된 제사장, 다른 방법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다른 선지자들은 다 다른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선지자 역할하기 위해선 교회나 학교에서 월급 받으면 안 됩니다. 월급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다 월급 받기 때문에 진리대로 말 못해요. 월급 주는 사람 원하는 대로 말해야 합니다. 목사는 목회자입니다. 선지자와는 역할이 다릅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목사면 목사길 가고 선지자면 선지자길 가야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처음 목회할 때 사회 불의가 많아서 정치일 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일 그만두었어요. 다시 평신도와 똑같이 평범한 건축일 하면서 정치일을 했습니다. 당시 세력 있는 자들의 미움을 얼마나 받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저를 죽이려고 해요. 대지주들이 얼마나 나를 미워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당시 선거에서 우리가 지지하던 후보자가 떨어졌어요. 그 때문에 내 일자리도 없어졌어요. 해고를 당했어요. 여당 정치인의 압력 때문에 - 그래서 3개월 동안 엘리야와 똑같이 까마귀들이 저를 먹였어요.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 - 바로 그 지방의 까마귀들입니다. 흑인들. 그들이 우리를 먹였어요. 우연히 우리 처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살았어요. 세력 있는 사람들이 안돼! 그 사람 죽으면 좋겠다. 굶어 죽었으면 좋겠다. 온갖 핍박을 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 생활입니다.
때가 와서 하나님께서 다시 목회자가 되라고 하여 다시 목회자의 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지나 다시 그 지방을 방문해 보았는데 그때 우리가 심었던 씨앗이 나오기 시작하였어요. 효과가 많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죠지아주입니다. 전 미국에서 제일 앞서 흑인인권 인정하는 지방이 바로 그 지역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일했던 곳이었습니다. 소득 없었던 것 같았던 일이 지나고 보니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무슨 일 해야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해야 하는지 아십니다. 이 세상 워낙 복잡해서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성령 통하여 받으면 순간순간마다 내가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언제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해야 하는지? 모두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논리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일할 때 효과적으로 하는 것도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이 안 계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짐작하기는 해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가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산골짜기에서 온 말씀]1번 테이프 중에서 발췌(89년 미성문화원 제작)


 내가 만난 대천덕 신부님

 

오래 전, 어느 겨울날 예수원을 찾았습니다.
초행길이라 헤매고, 태백시 다가서 얼음길에 미끄러져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레카차를 불러 정비공장에 맡기고, 예수원에 전화하였습니다. 결국 예수원의 오래된 트럭에 올라 예수원을 들어가는데 그 트럭마저도 예수원의 눈 언덕길을 올라가지 못하여 이럭저럭 도착하니 밤 12시가 다된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안내한 분에게 “내일 대천덕신부님을 좀 뵐 수 있느냐?” 물으니… 선약 없이는 개인 면담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배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원 가족들과 손님을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에서 마침 늦게 들어온 저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덧붙였습니다.
[어제 교통사고로 늦게 도착하였습니다. 예수원의 기도 덕분인지 이렇게 무사합니다. 대신부님을 개인적으로 좀 뵙고자 왔는데, 선약 없이는 불가하다고 해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신부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주실수는 없겠습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대놓고 청중 앞에서 부탁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온유한 표정에 미소를 띄우며 ?알겠습니다. 연락을 드리지요.? 이렇게 첫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얼마 후 면담실(기도실)로 안내되었고, 바쁘신 신부님이라 단도직입적 용건을 말했습니다.(당시 신앙계잡지의 “산골짜기에서온 편지 저자로 유명했음)
[신부님의 책을 보고 놀랐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도 나가지 않는 저 같은 사람도 감동을 받았는데… 하여튼 신부님의 책을 영문으로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여 미국인과 교포 2세들에게 보급하고 싶습니다.]
미소를 띄우며 듣고 계시던 신부님은 조용히 일어서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옆의 캐비넷 문을 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그 동안 신앙계지를 통하여 발표된 원고와 아직 발표되지 않은 원고 등 엄청난 량의 원고뭉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로 제가 “원하는 원고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두 영문으로 된-
신부님은 [좋은 생각입니다. 모두 다 가져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깜짝 놀랐습니다. 초면에 주소도 모르는 또 교회도 다니지 않는 저에게 수십 년간 피땀으로 이루어 낸 그 귀한 원고를 몽땅 다 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고를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겸양의 미덕!
일단은 사양해 보았습니다.(속으로는 가져갔으면 했는데…)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났고 또 저를 잘 모르시고…, 계약도 해야 되고… 나중 서울에서 확인시킨 후 받겠습니다.] 또 동참한 예수원 가족 한 분도 거들었습니다.
[그러믄요. 나중에 정식계약을 한 후 원고를 주셔야지요.]
꽤 오랜 시일이 지났지만 그 원고는 제게 오지를 않았습니다. 이유는 알지만 침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신부님의 테입은 제작되었고, 그 때문에 여러 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태백행 버스 속에서 주위 산세를 자세히 가르쳐주시는 자상하심과 식사할 때에도 중국집에 가자고 하시면서 “야끼만두”를 드시는 서민적인 것이 몸에 배이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임을 밝혔음에도 차별 없이 대해주시는 따뜻하신 마음과 모든 분들에게 대하는 겸손하신 행동은 언행일치의 삶을 사시는 분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친절과 사랑이 가득찬 제인 사모님의 부드러운 눈빛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온 나라가 IMF 한파로 고통을 겪고 있는 어려운 때인 98년 5월 [믿는 자의 빛]에 대하여 신부님께 편지를 띄웠습니다.
바쁘신 중에서도 귀한 답장을 보내주시어(그것도 번역까지 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로 인해 신부님의 글들을 재편집하면서 믿음의 선각자들은 다 자진해서 고통의 길, 힘든 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택하였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처럼…
그 동안 책 제작에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읽으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적인 체험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발행인- 미성 문화원 대표